기도

219일: 성도들이 주님의 비추는 빛 아래서 그분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한국복음서원 0 5,917 2021.01.27 07:47

219일: 성도들이 주님의 비추는 빛 아래서 그분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성도들이 자아성찰이나 단지 객관적인 지식에 따라 자백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도들이 주님과의 사랑의 교통 안에서 그분의 빛의 비춤 아래서 주님을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아 2:9 및 각주91, 히 12:2, 사 6:1, 5, 욥 42:5-6, 및 각주 61).


아 2:9 — 내 사랑하는 이는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 같답니다. / 지금 그이가 우리 담 뒤에서 서성이며 / 창문들 틈으로 들여다보고 / 창살 틈으로 엿보고 있군요.


아 2:9 각주 1, 담 — 그리스도에 대한 점진적 체험의 첫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분을 추구하여(아 1:2-4상), 내실에서의 교통으로 도움을 입고(아 1:4하-6상) 교회생활 안으로 이끌려(아 1:6하-8) 그곳에서 변화를 체험한 다음(아 1:9-16상, 2:1-3상), 완전한 만족을 위해 안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 안으로 들어간다(아 1:16하-17, 2:3하-7). 이러한 성취는 결국 그녀를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기 영적 상태, 곧 자기가 얻은 완전함 가운데에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지의 여부를 지나치게 주의하는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녀를 자기 성찰에 빠지게 하였으며, 이 자기 성찰이 그녀를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벗어나 담을 쌓고 은둔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해하는 상태에 이른 모든 영적인 사람들이 결국에 가서는 자기 성찰에 빠지게 되고, 자아를 살필 뿐 아니라 분석하기까지 한다(비교 히 12:2).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자아는 더 강해져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연인의 생활에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만다.

히 12:2 —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주목합시다. 그분은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사 6:1, 5 —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 그때 내가 말하였다. / “내게 화가 있겠구나, 내가 이제 죽게 되었음이라! / 내가 입술 부정한 사람이요 / 입술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주하면서 /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내 눈으로 뵈었음이라!”


욥 42:5-6 — 제가 주님에 대해 귀로만 들어 왔으나 / 이제는 제 눈으로 주님을 뵈었습니다. / 그러기에 제 자신을 혐오하며 /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욥 42:6 각주 1, 혐오하며 — 우리가 하나님을 더 뵙고 더 알고 더 사랑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더 혐오하게 되고 더 부인하게 된다(마 16:24, 눅 9:23, 14:26).


사역의 말씀 발췌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보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눈을 돌려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영적인 생활에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다. 앞에서도 자신의 느낌, 의향, 생각을 분석하는 자아 분석은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수년 전에 나는 《이기는 이》이라는 영어 잡지에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필자는 자아란 단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으로 살게 하는 것이라고 명기하고 있었다. 이 말은 정말 깊은 말이며 또한 매우 실지적인 말이다. 우리가 자신을 생각해 볼 때마다 자신 안에서 행동하게 된다. …

승리의 길은 끊임없이 자신을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눈을 돌려 예수님을 보는 데 있다. 우리 자신의 것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악한 생각을 돌아보는 데에도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채우심으로 자신의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데 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나아가는 것이 멈춰진다. 성경에서는 자신의 상태를 반성해 보라고 하지 않고, 눈을 돌려 예수께로 달려가라고 우리를 부른다.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어둠 속에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틀림없이 잘 달릴 것이다.(워치만 니 전집, 9권, 부흥보(2), 자신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빛, 18-19쪽)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는가? 지식에 따른 자백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깨닫고서,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구한다. 우리는 양심으로 통감하지 않고, 후회하는 느낌도 없으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이것은 생명의 밖에 있는 자백, 즉 우리의 참된 상황이 빛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자백이다. 하나님께서 단지 지식에 따른 그러한 자백을 인정하시는지 인정하지 않으시는지 나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자백이 있다. 우리가 교통 가운데 있을 때, 빛은 우리를 관통하여 비추면서 우리의 참된 상황을 드러낸다. 우리는 후회로 가득하고,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그리고 자백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참된 자백은 내적인 빛의 드러냄으로부터 온다.

오직 지식에 따라서 자백한다면, 우리는 “오, 주님. 한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이전처럼 한담을 계속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담하는 것에 빛이 비치어 생명 안에서 자백한다면, 그러한 자백은 우리의 입술을 닫게 할 것이며, 또 다른 헛된 말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우리의 자백은 단지 우리의 양심만이 아닌,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만질 것이고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위트니스 리 전집, 1978년, 2권, 생명 메시지 1, 7장, 329-3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