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성경 안에 있는 숨은 보석이자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두에게 큰 보물입니다. 이 실행은 1966년에 지방 교회 안에서 처음 회복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모두는 매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항상 기억을 새롭게 하여 순수한 생각을 일깨워야 합니다(벧후 3:1). 따라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시 새롭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십시오.”라고 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 있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전 12:3)

예수 예수 나의 생명 주 사랑하므로
주 이름 하루에 천 번 부르게 하소서
(찬송가 169장)


신약에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고 선포하는 것과 관련하여 주요한 세 개의 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은 “그대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십시오.’라고 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 있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11절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세 절에 선포된 부분은 퀴리오스 이수스(Kyrios Iēsous) 곧 ‘주 예수’ 또는 퀴리오스 이수스 크리스토스(Kyrios Iēsous Christos)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매우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입니다. 비록 이 선포는 두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교회의 믿음의 기반이 아주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제대로 번역하기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서 이 어구는 하나의 선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명사들이 단순한 등식 관계의 문장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주격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어구가 그분을 부르는 호격처럼 보이고, 또 영어로 직역할 때 그런 식으로 나타날 수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선포에서 주어는 ‘예수’가 아니라 ‘주’입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 점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주님은 예수님이시다.’라는 표현은 영어로 그 의미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먼저는 온 우주의 주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바로 이 호칭이 구약의 여호와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칠십인역 성경(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에서 여호와는 퀴리오스(Kyrios)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주님(퀴리오스)께서 예수님이시라고 선포하는 것은 여호와의 육체 되심과 아들의 인격 안에서의 그분의 인간 생활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이신 여호와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이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그 히브리어 원어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포를 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로마와 예루살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대 역사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선포에는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늘날 믿는 이들에게 퀴리오스 곧 주님으로 선포되고 계신다는 것은 먼저 그분께서 더 이상 죽은 분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며, 이는 그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또한 그러한 선포는 그분께서 그분의 아버지의 보좌로 승천하시어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얻으셨음을 가리킵니다(계 3:21).

믿는 이들이 이러한 선포를 하는 곳인 교회라는 환경 안에서 그분의 머리되심이 확증됩니다. 이는 그분께서 온 우주의 주님이신 것과 같이, 교회 곧 그분의 몸에게는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엡 1:22-23). 이 선포에는 또한 영원 미래에 있을 심판이 암시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퀴리오스는 예수님께서 오늘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에 우리 모두가 심판하시는 그분께 낱낱이 진술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요 5:22, 27, 행 10:42, 17:31, 딤후 4:1, 8). 매우 저명한 교회 역사학자인 켈리(J. N. D. Kelly)는 이 선포를 신약에서 가장 간결한 한 문장으로 제시된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르며, 어쩌면 이 선포가 신약에서 ‘믿음의 고백’ 혹은 ‘믿음의 공식’으로서 기능하는 유일한 구절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선포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간단하면서도 결정화된 방식으로 강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이 선포를 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날마다 성령의 체험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입이 어느 날 이 선포를 하게 될 것이라고 고대하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높이 올리시고 그분께 그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선포하는 것은 매우 객관적입니다. 성경이 자주 묘사하고 충고하는 바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포를 확고하게 내포하고 있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런 선포를 확고하게 내재화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분, 우리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분, 어려움에 처했을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분,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하는 대상이신 분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 “주 예수님!” 우리는 이 이름을 하루에 천 번 불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신’ (롬 10:12) 주님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해 이것은 필수적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구약과 신약의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에서도 여러 번 자세히 설명되고 권해집니다.

이 실행의 풍성하고 긴 역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하는 사도행전 2장 21절의 놀라운 각주에 결정화된 방식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절의 각주 2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 때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이 각주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구약 시대에는 에노스, 욥,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각주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신약에서 주님을 부르는 실행에 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글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전 1:2). 이것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의 주요 실행으로서,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누릴 수 있게 한다(롬 10:10-13). 초기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 부르는 것을 각처에서 실행했고(고전 1:2),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보편적인 표시가 되었다(행 9:14, 21).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 초기의 성도들과 그 이전 구약 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실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1966년에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이것을 회복하기 시작하셨고,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것을 우리 가운데서 회복하고 계십니다. 리 형제님은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떻게 회복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번은 주일 집회 전에 모두가 관례적으로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일어나 “우리 모두는 집회에 오면 네 가지 말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그 네 마디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오, 주, 아멘, 할렐루야!”라고 네 마디를 말해 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것을 훈련했으며 어떤 사람은 즉시 찬송을 지어서 모든 사람이 부르게 하였다. 나는 그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 부르기’를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엘든 홀 집회소에 있었으며 많은 성도들이 그 부근으로 이사 왔다. 해 질 녘이 되면 집 안에서든 길에서든 집회소에서든 모두들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한 뜨거운 광경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의 최신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징조, 1장, 13-14쪽)

1960년대 후반부터 리 형제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여러 각도에서 많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유기적인 실행의 풍성한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리 형제님의 사역을 통해 깨달을 수 있듯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적으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실행입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실행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55절과 56절에서 신언자 예레미야는 “오, 여호와님! 저는 아주 깊은 구덩이 속에서 /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 주님은 제 음성을 들으셨으니 / 제 호흡과 부르짖음에 주님의 귀를 막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라도 주님을 부름으로써 주님 안에서 호흡할 수 있고 그분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역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을 받고, 주님의 풍성에 참여하고 그것을 누리며, 주님을 먹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을 마시며, 주님의 이름의 실재를 만지고,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이러한 길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원천에서 기쁘게 물을 마시는 길이고(사 12:3-4),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즉 즐겁게 그분을 누리는 길입니다(욥 27:10).(행 2:21 각주 2)

안타깝게도 이 글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에 관한 리 형제님의 사역의 말씀을 더 추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에 있는 내용으로 고무되어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고전 1:2) “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칠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의 이름의 귀중함과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의 중요성과 단순성에 대해 알면 알수록 분명 “주 예수님!”이라고 하루에 천 번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바버(M. E. Barber) 자매님이 쓴 찬송의 가사처럼 “주의 이름 호흡함이 참생명을 마심일세” (찬송가 65장)라고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