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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기도 안에 교통하여 영 안에 주 뵙겠네
  작성자 한국복음서원   작성일 2007/03/30 15:18   조회수 21,724
  첨부파일  
기도 안에 교통하여 영 안에 주 뵙겠네
기도 - 주님께 간구함
 


5. 기도 안에 교통하여 주의 말씀 들으리
주의 뜻을 새기면서 그의 갈망 이루리

6. 기도 안에 교통하여 주님 안에 잠기리
주의 영광 날 적실 때 주를 반사하겠네


찬송 해설

첫째 찬송(게시물 6번 찬송)과 대조적으로, 위트니스 리가 쓴 이 찬송은 주님과 개인적이고 따뜻하며 친밀한 교통을 갖게 하는 기도를 계속 발전시키는 풍성한 체험으로 가득합니다. 여기서 이 찬송의 초점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유익을 구하는 성숙한 믿는 이의 감상을 표현합니다. 워치만 니는 이러한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다른 종류의 기도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필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이러한 기도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속 거하며, 그들의 갈망과 생각은 분명히 하나님의 갈망과 생각에 연합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분의 갈망과 생각을 보여 주시고 그것으로 그들을 감동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과 생각이 기도하는 이들의 갈망이 되었고, 또한 그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영문판, 453)

이 찬송의 중심 사상은 ‘기도 안에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교통’이라는 단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해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회적인 대화와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성경적인 정의는 훨씬 더 심오하며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은 그의 첫째 서신에서 주 예수님의 사도들이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통을 누린다고 증언하며, 그들과 함께 동일한 이 교통을 누리도록 모든 믿는 이들을 부릅니다(요일 1:3). ‘교통’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프리츠 리네처(Fritz Rienecher)는 그의 저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 연구(A Linguistic Key to the Greek New Testament)>에서 “이 단어는 개인의 이익이나 갈망을 제쳐두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785)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교통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성한 목적에 참여하여 그 목적을 우리의 목적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라이프 스타디>에서 위트니스 리가 한 말을 통하여 기도를 예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 본 이 찬송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으로 알게 된다면 교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나는 교통을 단순히 신성한 생명 안에 있는 누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또한 교통이 공동의 목적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무런 목적 없이 우리에게 누림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으시고, 그분의 생명의 교통 안에서 우리에게 누림을 주실 때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먹여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신성한 출생을 근거로 하여 신성한 의와 사랑의 생활을 함으로써, 악한 자와 세상과 죄와 모든 우상을 이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문판, 49-50)

교통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이제 이 찬송이 주는 메시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1절과 후렴이 같습니다. “기도 안에 교통하여 영 안에 주 뵙겠네 주의 임재 안에 묻고 은밀히 기다리리.” 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찬송의 가사는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이지만, 그 사상은 매우 심오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 안에서 주 뵙겠네.”라는 가사 속에서 발견됩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고”(6:18, 회복역 참조). 여기서 영은 거듭남이라는 과정을 통해 신성한 영과 연결되고 연합된 우리 사람의 영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를 주님께 열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잠잠하게 하며,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가장 깊은 부분, 곧 우리 존재에서 가장 참된 부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었습니다(고전 6:17). 따라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느낌은 주님의 영의 느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사용해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느낌을 이해하고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을 조화시켜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항목들을 나열하는 식으로 성급히 기도하거나 교독문을 읽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목표를 조망으로 삼고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고해야 합니다. 영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항목들을 우리에게 깊이 새겨주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시적이고 문학적인 문장으로 만들 필요가 없으면, 우리의 내적인 느낌에 따라, 사려 깊게 솔직하고 정직하고 참되게 말하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 예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영 안에서 주 뵙겠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고후 4:6). 우리가 그분을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더욱이, 우리가 그분을 볼 때 우리는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면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고후 3:18). 기도하며 예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님을 친밀하게 접촉하기를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다정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탁월한 지식”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간증했습니다. 바울의 최고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저항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철저한 교통을 가짐으로써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으로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바울을 만났을 때, 바울은 구주의 인격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한 그의 자랑을 이러한 식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묻고 들음으로써’ 예수님과 우리의 교통을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할 때 주님의 말씀은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바라는 요구사항만을 주님께 늘어놓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주님께 연결되고 주님의 목표와 의도에 연결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며, 주님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은밀한 곳에서 기다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하게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효과적인 기도 생활은 바로 은밀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자주 한적한 곳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막 1:35, 눅 5:16, 6:12). 이러한 식으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독립적인 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밀하고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2절은 우리에게 주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깊은 존재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 전체를 주님께 열어 드림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안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조정하시며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우리의 마음 안에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입지를 주님께 드립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께 우리 안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의 감추어진 죄와 세상적인 욕심과 드러내지 않은 의도들을 폭로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와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이고(요일 1:6-9), 고린도후서 3장 14절부터 18절까지에 나온 것처럼 밝은 빛 가운데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얼굴에 수건이 가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수건은 그들의 마음을 가리는 완고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걷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돌이켜질 때마다, 그 수건이 제해집니다. 돌이키는 행위가 바로 수건을 거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킨 우리는 안에서부터 완전히 열려 해방을 체험하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분의 얼굴을 주목하고 거울처럼 그분을 반사하게 됩니다. 돌이키고 바라보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3절은 우리의 기도가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믿음으로 주 찾고 주의 영 만지기 배우며 겸손히 기다리리.” 믿음은 효과적인 기도에 없어서는 안 될 요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또한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하고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약 1:6). 그러나 믿음은 우리 안에 본래부터 있는 속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할당된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보배롭고 지극히 귀한 약속들을 통하여 강화되고 지속되는 것입니다(벧후 1: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일은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담대하게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10:19-23).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주 영 만지기를’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고후 3:17). 이 신성한 사실은 주님께서 다만 승천하신 주님으로서 하늘들에 계실 뿐 아니라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 사람의 영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15:45, 롬 8:9-11, 딤후 4:22). 주님은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접촉할 수 있고 그분과 친밀한 교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둘째이신 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영원히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삼일 하나님의 둘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적인 움직임 안에서 그분은 그 영으로 실재가 되십니다. 즉 지금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만지고 받아들이고 누리고, 심지어 그분과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고 우리의 영을 알고 우리의 영을 관심함으로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통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을 앎으로써 그 영이신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그 영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영원토록 분리되고 멀리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영이신 주님을 접촉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역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 그분을 우리의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으로 받아들여 그분 안에서 새 창조가 될 것입니다(고전 1:30, 고후 5:17). 우리는 이제 ‘겸손히 주 기다립니다.’ 우리는 심오하지만 친밀하게 주님을 기다리며 섬깁니다. 주님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영원한 몫과 우리의 내재적인 근원으로 우리에게 공급되고 우리를 조성하여,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4절은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의 실재 누리리 항상 안의 느낌 따라 영으로 기도하리.” 우리는 기도할 때 또다시 우리의 영을 상기해야 합니다. ‘안의 느낌을 따라 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엡 1:17)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 많은 믿는 이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은 타고난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열려 있을 때, 주님은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주실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시는 내주하시는 그 영의 운행을 통해 하나님을 따라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롬 8:26-27, 16).

5절은 기도의 또 다른 핵심적인 방면, 곧 듣는 방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 들으리 주의 뜻을 새기면서 그의 갈망 이루리.” 우리가 듣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즉 우리의 생각을 잠잠하게 하고 우리의 영을 열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조화되어 결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구주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우리는 들을 때 ‘주의 뜻을 새겨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분의 기도를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늘들에서 중보기도 하시는 대제사장의 기도를 반향하게 됩니다. 이럴 때 모든 일들에서 우리는 그분의 갈망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간구의 효력은 더욱 증가하고 주님의 함께하는 시간도 더욱 달콤해집니다.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친밀한 기도의 가장 매혹적인 지점으로 이끌립니다. “주님 안에 잠기리 주의 영광 날 적실 때 주를 반사하겠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어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내주하시는 영이신 주님을 접촉할 때 결국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안식 안으로 이끌리고 주님 안에 잠기는 안식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가 주님 안에 잠길 때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으로 적셔지고 그분의 탁월함을 반사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갈망이며,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기도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게리 카이저(Gary Kaiser)
 
- 참고문헌 -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위트니스 리, 요한일서 라이프 스타디
워치만 니, 워치만 니 전집 38권
프리츠 리네처(Fritz Rienecher), 헬라어 신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 연구(A Linguistic Key to the Greek New Testament)
정연화
멋진 찬송가 듣게해 주셔서 고마워요 노래도 불렀으면 더 좋겠는데요 삭제 201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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